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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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1058년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즉위하여 달마티아 연안 도시들을 크로아티아에 편입시키고, 로마 가톨릭교회 문화를 확산시키는 등 영토 확장과 내정 강화에 힘썼다. 그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라틴어 예배를 지시하고, 슬라보니아에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를 반으로 임명했다. 1075년 노르만족의 공격으로 포로가 되어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솔린에 안치되었다. 그는 아들이 없어 드미타르 즈보니미르가 왕위를 승계받았고, 크로아티아 역사에서 중요한 통치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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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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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 |
왕조 | |
가문 | 트르피미로비치 왕조 |
통치 | |
즉위 | 1058년 |
대관식 | 1059년 |
퇴위 | 1074년 |
전임자 | 스테판 1세 |
후임자 | 디미트리예 즈보니미르 |
직함 | 크로아티아 왕 달마티아 왕 |
생애 | |
출생 | 알 수 없음 |
사망 | 1074년 |
매장지 | 솔린의 성 스테판 교회 |
가족 | |
아버지 | 스테판 1세 |
어머니 | 히첼라 오르세올로 |
종교 | |
종교 | 가톨릭 교회 |
2. 생애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스체판 1세 국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였던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의 딸 이첼라(Hicela)이다. 105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즉위,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의 승인으로 비오그라드나모루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교황은 발칸반도를 로마 가톨릭교회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크레시미르 4세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고대 교회 슬라브어(글라골 문자) 대신 라틴어 예배 의식과 설교를 지시했으나,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1063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금욕 생활과 라틴 전례 보급에 반대하는 부크(Vuk) 반란이 일어났지만, 1064년 크레시미르 4세가 주도한 종교 회의에서 이단으로 파문되었다.
크레시미르 4세는 달마티아 연안 도시들을 크로아티아에 편입시키고,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하여 닌, 시베니크, 스크라딘 등의 도시 발전을 이끌었다. 1066년 그의 사촌 치카(Čika) 수녀원장이 자다르에 성모 마리아 교회를 설립하자, 크레시미르 4세는 교회 헌장을 수여하며 로마 가톨릭교회 문화를 확산시켰다.
크레시미르 4세는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동부 내륙으로 영토를 넓혔다.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를 슬라보니아의 반(Ban, 영주)으로 임명하는 등 효율적인 영토 관리를 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셀주크 왕조에 패배하자, 마케도니아의 슬라브족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072년 크레시미르 4세는 이들을 지원했다.
1075년 노르만족이 크로아티아를 공격, 라브섬을 포위했으나 실패하고 츠레스섬을 점령했다. 크레시미르 4세는 포로로 잡혀 석방 조건으로 아드리아해 연안 도시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풀려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솔린의 성 스체판 교회에 안치되었다. 아들이 없었기에 드미타르 즈보니미르가 왕위를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스체판 1세 국왕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를 역임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의 딸인 이첼라 사이에서 태어났다.[6] 1058년 아버지 스체판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의 승인을 받아 비오그라드나모루에서 대관식을 치렀다.[7]1054년에 일어난 동서 교회의 분열로 인해 교황은 발칸반도를 로마 가톨릭교회의 거점으로 여겼다. 크레시미르 4세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고대 교회 슬라브어(글라골 문자) 대신 라틴어에 따른 교회 예배 의식과 설교를 지시했지만, 한동안 높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11] 1063년 교회 성직자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금욕적인 생활, 라틴 전례 보급에 반대하면서 일으킨 부크(Vuk) 반란이 일어났지만, 1064년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주도한 종교 회의에 의해 이단으로 분류되면서 파문되고 만다.[11]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달마티아 연안에 위치한 여러 도시들을 크로아티아에 편입시키기 위해 주력하는 한편 달마티아 연안에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했다. 이를 계기로 닌, 시베니크, 스크라딘과 같은 도시들이 발전했다. 또한 크로아티아에 로마 가톨릭교회 문화를 확산시켰다. 1066년에는 크로아티아 최초의 수녀가 된 그의 사촌인 치카(Čika) 원장이 자다르에 성모 마리아 교회를 설립했다.[15]

2. 2. 종교 개혁과 내정 강화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스체판 1세 국왕의 아들이자 베네치아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를 역임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의 딸인 이첼라(Hicela)였다. 1058년 스체판 1세의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의 승인을 통해 비오그라드나모루에서 대관식을 치렀다.[6][7]1054년에 일어난 동서 교회의 분열로 인해 교황은 발칸반도를 로마 가톨릭교회의 거점으로 여겼다.[8]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유대 관계를 강화하기 이전까지 크로아티아의 지방 귀족, 영주, 평민들은 비잔티움 전례에 따른 관습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고대 교회 슬라브어(글라골 문자) 대신 라틴어에 따른 교회 예배 의식과 설교를 지시했지만 한동안 높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11] 1063년에는 교회 성직자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금욕적인 생활, 라틴 전례 보급에 반대하면서 일으킨 부크(Vuk) 반란이 일어났지만 나중에 진압되었고, 1064년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주도한 종교 회의에 의해 이단으로 분류되면서 파문되고 만다.[12]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달마티아 연안에 위치한 여러 도시들을 크로아티아에 편입시키기 위해 주력하는 한편 달마티아 연안에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했다. 이를 계기로 닌, 시베니크, 스크라딘과 같은 도시들이 발전했다. 또한 크로아티아에 로마 가톨릭교회 문화를 확산시켰다. 1066년에는 크로아티아 최초의 수녀가 된 그의 사촌인 치카(Čika) 원장이 자다르에 성모 마리아 교회를 설립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치카에게 성모 마리아 교회 헌장을 수여했다.[15]
그는 크로아티아의 영토를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동부 내륙 지방으로 확장시켰다. 스베토슬라비치(Svetoslavić) 가문 출신의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를 슬라보니아의 반(Ban, 영주)으로 임명했을 정도로 크로아티아의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16]
2. 3. 영토 확장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동부 내륙 지방으로 크로아티아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슬라보니아의 반(Ban, 영주)으로 스베토슬라비치(Svetoslavić) 가문 출신의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를 임명하여 크로아티아의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해 나갔다.[17]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반의 직책이 처음으로 분화되기 시작하여, 1067년에 여러 반이 처음 언급되었다. 크로아티아 반 외에도 이 시기에 슬라보니아 반국이 존재했으며, 당시에는 크레시미르의 후계자인 드미타르 즈보니미르가 이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66년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시베니크 시가 처음 언급되었으며, 한동안 그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현대에는 "크레시미르의 도시"라고 불린다.[18]
1071년 비잔티움 제국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왕조에게 패배하면서 혼란에 빠지자, 마케도니아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을 비롯한 여러 슬라브족 주민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1072년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마케도니아에 거주하고 있던 보야르가 일으킨 반란을 지원했다.
1069년, 그는 닌 근처의 마운 섬을 자다르의 성 크르셰반 수도원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육지와 바다에서 왕국을 확장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기증했다(''quia Deus omnipotens terra marique nostrum prolungavit regnum''). 생존한 문서에서 크레시미르는 "우리 달마티아 해에 위치한 우리 자신의 섬"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nostram propriam insulam in nostro Dalmatico mari sitam, que vocatur Mauni'').[19][20]
2. 4. 노르만족과의 전쟁과 최후
1071년 비잔티움 제국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왕조에게 패배하면서 혼란에 빠지자, 마케도니아 지방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들을 비롯한 여러 슬라브족 주민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1072년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마케도니아에서 보야르가 일으킨 반란을 지원했다.[23]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은 발칸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고 크레시미르는 곧 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1074년, 달마티아 연안 도시와 비잔틴의 초청을 받은 노르만족은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영토를 남부 이탈리아로부터 침공하여 3월 19일부터 스플리트, 트로기르, 비오그라드나모루, 자다르를 거의 1년 동안 지배했다.[23][24] 1075년 노르만족 군대는 4월 14일부터 5월 초반까지 라브섬을 1개월 가까이 포위했지만 실패했고, 5월 9일 크레스 섬을 점령했다.[23][24] 이 과정에서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노르만족 군대의 포로로 잡혔고, 석방 조건으로 많은 몸값을 지불하고 아드리아해 연안 도시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석방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23] 1075년 2월, 베네치아 공화국은 노르만족을 몰아내고 스스로 달마티아 도시를 장악했다.[23]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23] 그의 시신은 솔린에 있는 성 스테판 교회에 안치되었다.[25] 수세기 후 오스만 제국은 교회를 파괴하고 수도사들을 추방했으며 무덤을 파괴했다.[26]
3. 유산
크레시미르는 일부 역사가들에게 크로아티아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토마스 대주교는 13세기에 저술한 ''살로나 역사''에서 달마티아 해안 도시들을 크로아티아 국가와 통합하고 크로아티아 영토 확장의 절정에 도달한 그의 중요성을 기려 그를 "대왕"이라고 칭했다. 크로아티아 해군의 RTOP-11함은 크레시미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시베니크 시에는
4. 참고 문헌
- 네벤 부닥 (2018). 《Hrvatska povijest od 550. do 1100.》 [550년부터 1100년까지의 크로아티아 역사]. Leykam international. http://www.leykam-international.hr/publikacija.php?id=167
- 페르도 시시치, Povijest Hrvata u vrijeme narodnih vladara, 1925, 자그레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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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Thomas e. c. 55: "Ibi namque magnificus vir Cresimir rex. in atrio videlicet basilice Sancti Stephani tumulatus est cum pluribus aliis regibus et reginis"
[26]
웹사이트
Gospin otok
http://www.solin.hr/[...]
201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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